설영준은 병이 완전히 완쾌된 건 아니었다.하지만 그는 퇴원을 고집했고, 의사 선생님은 그의 퇴원을 동의하지 않았었다.오후, 박윤찬이 또 사무실로 그를 찾아왔다.설영준은 창백한 안색으로 양복 차림을 한 채, 책상 앞에 앉아 진지하게 서류를 정리했다.“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박윤찬이 그에게 말을 건네자, 설영준은 손에 들고 있던 필을 멈칫하더니 차갑게 그를 바라봤다.“그쪽이 뭘 안다고 그래요?”“재이 씨는 갔어요?”박윤찬이 이어서 물었다.그 말에 설영준은 팔을 들고 있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현재의 그는 송재이 이름만 들어도 짜증이 났다.“여긴 왜 왔어요?”설영준은 그녀의 일에 대해 더는 듣고 싶지 않아 얼른 화제를 돌렸다.박윤찬이 그의 맞은편에 다리를 포개며 앉았다.“원래는 공적인 일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왔어요. 근데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때마침 어떤 여자랑 부딪혔거든요. 그 여자가 저한테 어떤 일들을 털어놓았는데, 설영준 씨가 흥미를 느낄만한 이야기 일 듯하네요. 어떤 일인지 듣고 싶지 않아요?”현재 기분이 좋지 않은 설영준은 박윤찬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저한테 말해주려거든 얼른 하고, 아니면 그냥 가세요. 저 아직 할 일이 많거든요.”“송재이 씨 관련된 일입니다. 남도에서 누군가가 재이 씨를 좋아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어때요? 듣고 싶지 않아요?”그 말에 설영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박윤찬을 쳐다봤다.박윤찬은 그 모습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히 웃어 보였다.“누군가가 재이 씨 같은 분을 좋아한다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죠. 하지만 재이 씨를 좋아한다는 그 사람, 아마 설영준 씨가 싫어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네요…”박윤찬은 말을 마친 뒤 자신의 표현이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사실 그 누가 송재이를 좋아한다고 해도, 설영준은 전부 다 싫다고 느껴질 것이니 말이다.그는 점점 어두워지는 설영준의 모습을 보고 더는 뜸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박윤찬은 조금 전 변호사 사무실 아래층에서 문예슬을 만났다고 직접적으
설영준은 문예슬의 그 속셈에 대해 잘 알고 있다.그는 자신이 방현수가 송재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게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지 않았다.게다가 박윤찬도 문예슬이 셔츠를 전달한다는 명분으로 그의 변호사 사무실까지 찾아가 송재이와 방현수의 소식을 이야기 해줬다고 했었다.박윤찬과 설영준은 서로 관계가 좋은 친구라 할 수 있다.하여 박윤찬이 알고 있다면, 설영준도 당연히 알고 있다고 보면 된다.즉, 이건 문예슬이 일부러 퍼뜨린 것이다.하지만 방현수와 송재이가 남도에서 만나 영화를 같이 본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비록 방현수가 올린 영화표 두 장 사진에 송재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설영준은 거기에 송재이도 있었을 거라 믿고 있다.그렇다, 그는 지금 질투하고 있다.누군가가 살짝만 도발해도 그 질투는 쉽게 폭발해 버릴 것이다.조금 전 박윤찬 앞에서는 애써 담담한 척 했지만, 그것은 사실 폭풍우가 오기 전 고요함과도 같다.…송재이가 학교 쪽 주임에 의해 사무실로 불려 갔다.주임은 그녀에게 정교한 VIP 입장권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학교 본부와 광고 투자자가 조직한 고급 무도회 입장권이었다.논리적으로 말하면, 막 입사한 신입 교사는 그런 곳에 참가할 자격이 없다.하지만 원래 초청을 받았던 선생님 중 한 분이 아이가 아파 참석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하여 그 기회는 송재이에게 주어지게 되었다.사실 송재이는 이런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자리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주임이 그녀를 생각해서 입장권을 준 이상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무도회에 참가하는 사람은 모두 다섯 명의 선생님이었다.그중에서 세 명은 송재이 보다 조금 어렸다.이런 자리에 초대를 받았으니,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들은 가는 내내 기분이 좋은지 재잘재잘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송재이도 그녀들의 즐거운 분위기에 점차 물들어갔다.이때 그 여자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꺼냈다.“이번 광고 투자자 중에 설한 그룹도 있대요. 설영준 대표님도 참석하시려
이왕 무도회장 파티에 초대된 거니, 송재이는 쭈뼛거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게다가 누군가 그녀에게 춤을 추자고 요청했고, 마침 시간도 맞아떨어진지라 자연스럽게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송재이는 이 모든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다만 한 곡이 끝나갈 무렵,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차가운 시선을 느꼈다.그녀는 틈틈이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을 찾으려고 시도 때도 없이 옆을 두리번거렸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다.노래 한 곡이 다 끝나갈 때쯤, 맞은 편의 남자가 그녀에게 물었다.“혹시 연락처 좀 줄 수 있을까요? 이제 시간 날 때 다시 데이트 신청하려 하는데…”“죄송하지만 이 사람 시간 없어요.”송재이가 답하기도 전에 갑자기 그녀 뒤로 웬 남자가 걸어오며 그녀의 답을 가로챘다.깜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려보니 설영준이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것이었다.지난번, 방현수와 춤을 출 때도 설영준에게 들켰었다.이번에는 다른 남자와 춤을 추면서 또 그에게 들켜버린 것이다.송재이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그를 모르는 척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설영준이 한 발짝 다가서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송재이는 설영준의 손아귀 힘을 느낄 수 있었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한편, 맞은편의 남자 또한 설영준이 경주에서 부자이자, 설한 그룹의 대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설영준과 실제로 처음 만나는 사이였고, 설영준의 아우라에 단번에 압도되었다.하여 그는 얼른 핑계를 대고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그 자리에는 설영준과 송재이 두 사람만 남았다.송재이는 멍하니 스테이지 쪽에 서 있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설영준을 바라봤다.“여긴 어떻게… 왜 또 당신인 거야?”그녀는 진심으로 놀랐지만, 설영준의 귀에는 그 말이 좋지 않게 들렸다. 경주에 있을 당시,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쫓아냈었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아직 입원 중인 그의 건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순순히 떠났다.하여 설영준은 그녀가 그 말만 기다린 게 아닐까 라는 의심을 했다.그래야만 그
송재이는 점점 설영준의 성격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꼈다.그녀는 설영준만 만나고 나면 좋았던 기분도 그에 의해 다운되곤 했다. 게다가 설영준 앞에서는 자신이 문제투성이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녀는 왠지 모르게 서러웠고,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좋지 않은 감정이 티 났다.하지만 그녀는 절대로 서럽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설영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는 이를 꽉 깨문 채 그녀를 놓아주며 양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그 시각, 그는 어쩔 수 없는 무력함과 표출해 낼 수 없는 화를 느꼈다. 그녀는 설영준과 헤어진 뒤로 모든 게 잘 풀리는 듯 보였다.새로운 도시로 가 다시 일자리와 묵을 집을 찾고, 다른 남자와 데이트도 하고, 신중하게 박윤찬의 선물도 골랐다. 어떤 선물을 했든 간에, 어쨌든 속으로 박윤찬이라는 존재를 생각했다는 거 아니겠는가?다른 남자들한테는 그토록 친절한데, 그의 앞에서는 모든 게 형식적인 것만 같았다.설영준은 예전에 송재이가 자신을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믿어왔었다.비록 송재이가 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속일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다.그녀에 대한 자신감이 지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니 말이다.설영준은 속이 터질 것만 같았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려났다.아무 말 없는 그의 모습을 본 송재이는 그에게서 격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아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설영준이 그녀를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그의 손끝은 살짝 차가웠고 송재이는 그의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그녀가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자 설영준은 다짜고짜 그녀를 문 쪽으로 끌고 갔다.하이힐을 신고 있던 송재이는 그의 끌어당김에 하마터면 비틀거리다 넘어질 뻔했다.그래도 다행히 설영준이 바로 그녀를 부축해주었다.한편, 송재이와 같이 파티에 참석한 몇 명의 동료들은 스테이지 옆에서 과일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그것은 송재이에게 있어 매우 친숙한 호르몬의 기운으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그녀는 그 기운 때문에 전에 그에게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그러나 결국은 자신이 독에 중독되어 버렸음을 깨달았었다.그녀는 자신의 허벅지를 힘껏 꼬집으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설영준이 그녀의 목에 키스하며 옷을 찢기 시작하자, 그녀는 발을 들어 그를 차버리려고 했다.“설영준, 저리 꺼져! 난 네가 싫단 말이야.”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영준은 그녀의 종아리를 꽉 조였다.그는 야릇한 자세로 송재이를 쉽게 통제하며 그녀를 가지고 놀았다.송재이는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붉어졌다.“미쳤어?”“미치긴 누가 미쳐? 송재이, 너 죽으려고 작정했지?”그는 그녀가 다른 도시에 사는 건 허락할 수 있어도, 그녀가 다른 남자들과 막 만나고 다니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그게 방현수든 박윤찬이든, 아니면 조금 전 송재이와 같이 춤을 추던 남자든 설영준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질투는 진정되지 않았다.“설영준, 우리 지금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네가 뭔데 날 간섭해? 예전의 너는 아무렇지 않게 주현아랑 만났잖아. 게다가 정아현과도 썸씽이 있었고 말이야. 네 자체가 쓰레기이면서 지금 날 간섭해? 넌 단 한 번도 나에게 미안해한 적이 없었어. 그리고 지금은 우리 다 성인 아니야? 단지 서로서로 즐기는 것뿐인데 너무 재미없게 굴지마!”즐긴 다라…하!예전의 설영준은 확실히 그녀를 가지고 놀았다. 하지만 현재는 서로 처지가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과거에 그들이 맺었던 관계는 확실히 진지하지만은 않았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입에서 그걸 직접 들으니 왠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특히 송재이가 지금 저항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너 아까 무대에서 다른 남자랑 춤추며 잘 웃었잖아. 지금도 그렇게 어디 한번 웃어봐. 왜 안 웃는 건데?”송재이:“…”그녀는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지금의 설영준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해
설영준은 단 한 번도 길가에서 파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일단 본인이 이런 걸 먹지 않으니, 다른 사람에게 당연히 사준 적도 없다.만약 평소였다면 그는 이런 음식은 건강에 해롭다고 송재이를 나무랐을 것이다.하지만 현재 상황은 다르다. 길가의 음식뿐만 아니라, 될 수만 있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그녀에게 따주고 싶었다.10분 뒤, 그가 다시 호텔로 올라가 방문을 열어보니, 송재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욕실에 들어가 보아도 그녀는 없었다.그렇다, 그녀는 가버린 것이다.설영준은 그녀의 마음을 돌렸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그는 침대에 앉은 채 테이크아웃한 음식을 옆으로 치우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송재이에게 전화를 걸려던 찰나, 주소록에 있는 그녀의 이름을 보고 그는 갑자기 멈칫했다.설영준은 그녀가 이유를 찾아 자신을 따돌리고 기회를 틈타 도망갔다고 생각했다.그런 게 아니라면 그녀 혼자서 조용히 있고 싶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분명히 그러할 것이라 생각했다.아까 샤워를 해 젖었던 설영준의 머리는 이제 완전히 말라 있었다.그는 짜증 나는 듯 머리를 움켜쥐었다.설영준은 그렇게 한참 동안 그 커다란 VIP룸에 혼자 앉아 있었다.한편 송재이가 현재 다니고 있는 음악 학원에서는 매년 투자를 유치 활동을 하고 있다.설영준은 이런 분야에 원래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와 관계를 맺으려고 일부러 그들의 광고주가 되었다.당시 총장은 설영준이 올해 투자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서 펄쩍 뛸 뻔했다.하여 VIP 초청장을 설영준에게 준 것 또한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그러나 당시 설영준은 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는 송재이가 괜히 자기 때문에 그 장소에 참석한 줄로 오해하고 우쭐대는 게 싫었으니 말이다.하여 원래는 한 번 가서 보고 바로 돌아가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꾸밀 줄 누가 알았겠는가!비록 아무런 노출도 없었지만, 파티장에서의 그녀는 너무도 아름답고 예뻤다.그것은 남자들이 좋아
이원희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몰랐지만, 그녀의 한마디에 송재이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원래는 눈물이 없는 그녀였지만, 그 순간은 왜인지 모르게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송재이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목구멍이 막혀 아무런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그녀의 모습에 이원희 또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이원희가 손을 뻗어 송재이를 다독이자, 그녀는 이원희 품에 안겨 참았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송재이는 작은 소리로 흐느끼다가 점점 대성통곡했다.그녀도 자신이 왜 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말 못 할 고통이 북받쳐 오르는 느낌이었다.다행히 울고 나니 아까보다는 많이 좋아진 듯했다.이원희 또한 더는 묻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안은 채 위로했다.그날 밤, 송재이는 잠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크게 운 탓인지 예상외로 빠르게 잠이 들었다.아마 진짜로 지쳤나 보다.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겹치면서 그녀의 인내력은 극에 달했다.송재이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떴을 때였다.그녀는 꼬박 11시간을 잤다.그래도 푹 자고 일어나니 모처럼 기분은 상쾌했다.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눈은 마치 복숭아처럼 부어있었다.한편, 박윤찬이 남도로 출장을 와 때마침 송재이가 근무하는 학교를 지나쳤다.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에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송재이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박윤찬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눈은 왜 그래요?”그녀도 오늘 자신의 모습이 사람을 만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이윽고 송재이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별거 아니에요. 아마 어젯밤에 감기 걸렸나 봐요.”박윤찬은 그 말을 반신반의했다.그러다가 어제 설영준이 남도에 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물었다.“혹시 영준 씨 만났어요?”설영준이라는 이름에 송재이는 물컵을 들고 있던 손을 자신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물을 하마터면 바닥에 쏟을 뻔했다.게다가 설영준만이 송재이의 기분을 이렇게 만들 수 있었
설영준의 차가운 시선에 박윤찬은 입술을 깨물었다.그도 설영준이 전부터 자신과 송재이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었다.그가 송재이에 대한 관심이 많을수록 설영준에게 덜미가 잡힐 것이다.방 안의 공기는 삽시간에 쥐죽은 듯 고요했다.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때쯤, 갑자기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 조용한 분위기를 깨뜨렸다.그것은 바로 사인을 받으러 온 설영준의 비서였다.여진 비서는 설영준의 옆에 멀뚱히 서 있었다.그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함을 눈치챘다.수년간 설영준과 같이 일하면서 지낸지라 눈치를 살피는 건 그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일이었다.그 순간의 설영준과 박윤찬은 모두 표정이 좋지 않았었다.사인을 받은 뒤 여비서가 나가려던 찰나, 박윤찬도 같이 일어섰다.“일이 있는걸 까먹었네? 먼저 가볼게요.”박윤찬은 더는 설영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설영준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박윤찬이 가는 모습만 바라보았다.어떤 일들은 일단 어긋나기 시작하면,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어쨌든 몇 년 동안 서로 알고 지낸 사이라, 그 누구도 여자 한 명 때문에 우정을 잃고 싶지 않을 것이다.…박윤찬이 간 뒤 설영준은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그날 호텔에서 송재이와 그런 일이 발생한 뒤 현재까지 불과 며칠 되지 않았다.설영준은 조금 전 박윤찬이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의 두 눈이 붉게 부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날 밤에 그녀가 집에 가서 울었을 것이다.그는 그녀가 여전히 자신에게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설영준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이 충동적으로 행동했음을 인정했다.그녀가 그를 대할 때, 심하게 반항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거절하는 표정을 지을수록 더욱 화가 났다.아마 이런 부분에서 그는 여전히 나쁜 본성을 가지고 있는듯했다.설영준은 눈을 감고도 그의 곁에서 통곡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는 마음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만 같았다.…한편 남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